화전은 산림피해를 격화시키고, 휴전선 남방의 화전민 주거지는 국방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정부는 1966년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였고 1974년도부터는 산림시책 중 중점시책으로 본격적인 정리사업을 감행하여 1978년도에 일소(一掃)하였다. 면내 소장된 자료는 농지개혁 관련 자료가 상당히 많은 분량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 자료는 음성군에서 시행된 농지개혁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다. 광주오피 수집된 사진 자료는 칠곡군 행정 관련 자료, 새마을운동 관련 자료, 농업기술센터 자료, 학교관련 자료, 성당 관련 자료들이었다. 또한 새마을운동 관련 문서도 다수 확보하였다. 충남 공주지역의 청주한씨 문정공파, 경남 울산지역의 경주김씨 대안군파, 전남 해남지역의 해남윤씨 어초은파 후손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는데,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경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펴낸 『고문서집성』내 和劑(처방전)류가 다수 확인이 되어 제외하고 청주한씨 문정공파와 경주김씨 대안군파에서 의약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2. 경화회와 『경화(耕和)』 경화회는 1963년 한국 최초의 자발적 농촌․ 그 가운데 규정집류는 11권이며, 敎育區의 현황을 살핀 자료가 2건, 敎育區의 설치배경과 폐지에 대한 반대 의견서 3건, 經理實務 교육자료 1건(『經理實務講習資料』)이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論山敎育區 敎育委員會의 회의규칙을 담은 『會議規則』, 『源泉徵收事務取扱要領』․ 사직 상소가 3점, 퇴계 이황의 손자인 이영도가 병자호란 때 행했던 공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증직을 받았으므로 그에 합당한 증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강운이 작성한 상소문 초본 1점과, 정절을 지킨 이 집안 며느리에게 정려각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 2점이 있다. 이번 사업으로 수집 조사한 이종률의 자료는 일부 간행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유고의 형태로 존재하던 것이다. 이종률은 한국전쟁 기간에 정전 평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부산에 정착했다. 이 두 시기에 이종률은 실천 활동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활동 방법으로 기록을 선택했다. 이후 15년 동안 이종률은 자택을 가르침의 현장으로 지역 내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을 지속하는 한편, 한국 근현대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장유고등공민학교 교사, 마산창신학교 교감을 거쳐 장유고등공민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지역유지들과 함께 장유학원 설립을 발기해 초대 장유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81)은 일제강점기에는 사비를 털어 ‘지양 강습소’라는 학교를 세워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될 때까지 인재를 양성했다고 하며, 한국전쟁 이후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양파 재배법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간행 유고들은 대부분 이종률이 군사정권에 의해 수감되었던 1960년대 전반기와 1974년 이후 투병시절이라는 두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방대한 양의 유고는 대부분 이 시절에 작성된 것이다. 조사결과 대부분의 문서고는 협소한 공간적 이유와 면사무소 증개축 과정에서 보존기한이 다한 문서들은 대부분 폐기되어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없었다. 이처럼 경주 이씨 양월문중 자료는 문중의 자료만이 아니라 서원과 유향소 자료를 포함하고 있어서 다양한 자료 구성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사 자료는 급속히 훼손되거나 소멸하고 있다. 신문리 본가에서 부친(김신도)이 관리해 오던 자료는 주택 공사로 농장 관리사에 잠시 옮겨 보관하던 중 2003년 9월 태풍 “매미”를 만나 일부 침수 피해를 입은 바 있으며, 부친 작고 후 2년 간 본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11년부터 자택으로 옮겨와 현재까지 관리되고 있다. 이외 면지역으로 장기면이 있으나 일부 지역이 행정중심복합도시로 편입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역사ㆍ민속분야의 관련 조사가 이미 이뤄진 상태로 중복조사의 우려가 있고, 또 많은 주민이 이주함에 따라 조사가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조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생활 여건의 어려움으로 일부 마을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기존의 자료들이 유실되고 있다. 문경시는 1995년 도농복합시특별법에 따라 기존의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하여 문경시가 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
피란민들이 모이고 이들을 구호하기 위한 공공기관과 민간단체들이 위치하면서 전형적인 피란민마을로 변하였다. 1949년에 포항읍이 시로 승격 분리된 후 동해안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0년에 포항종합제철(주)이 위치하면서 동남해안 공업지대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자료 소장자는 저자 김영순의 손자이자 저자 김신도의 차남 김용식씨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직장생활(13년) 후 주유소를 개점하여 운영 중에 있다. 3. 일제강점기 호적관련 자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개인정보에 관한 기록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제적부, 제호부 등이 그것이다. 이번 창녕군 근현대 자료조사 및 수집에서는 고암면의 제적부, 제호부 일부, 이방면의 호적사건지원부를 수집하였다. 이에 창녕군 근현대 자료 수집․ 창녕군 근현대 자료 수집․ 5. 농지개혁 관련 자료 농지개혁은 1949년 1월 국회에 농지개혁법안이 제출되면서 본격화되었다. 향후 묘지 관련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향후 수집에서는 보다 폭넓게 조사․ 그 가운데 고암면을 대상으로 전쟁 관련 자료를 조사․ 특히, 조사대상 모든 면에 걸쳐 시행단계에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관련 자료를 집중 조사․ 이 법안은 국내의 모든 한국인 지주 소유 농지 115만 6천ha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한 기록은 모든 행정기관에서 오늘날에도 보관․ 지역은 사회적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호작용이 자족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자연적 공간이었고, 따라서 문화적으로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단위가 되고 실재하는 역사적 경험의 전승 공동체를 형성하였다.